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빈 최씨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* [[야사(역사)|야사]]에 따르면 숙빈 최씨에게 [[숙종(조선)|숙종]]이 중전의 자리를 제의했으나 숙빈 최씨가 거절했다. 그러나 당시 사회상 미천한 가문 출신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름은 쉽게 결정되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. [[인현왕후]]와 [[희빈 장씨]]가 죽은 후 숙종은 후궁이었던 자는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교지를 내렸다. 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sa_12710007_001|#]] 이 교지의 타깃이 숙빈 최씨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는 [[조선시대]] 법도를 모르고 나온 주장이다.[* 조선 [[왕조]]에서 후궁에서 정실 왕비/세자빈으로 올라간 경우는 희빈 장씨를 제외하면 모두 [[양반]]가 출신의 간택 후궁이다. [[현덕왕후]], [[안순왕후]], [[폐비 윤씨]], [[정현왕후]], [[장경왕후]]. 승은후궁 출신으로 왕비까지 된 희빈 장씨는 [[조선]]사에서는 전례가 없던 매우 특별한 경우거니와, 장희빈 역시도 양반이 아닐 뿐 중인 중에서는 가장 잘 사는 대부 가문이였다.] 조선의 왕비는 단순히 왕의 총애가 아니라 철저하게 [[정치]]적 고려로 선택되는 자리라, 겨우 승은후궁 출신인데다 친정 집안도 한미한 숙빈 최씨가 감히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. 숙종의 후궁들 중에는 숙빈 최씨 외에 영빈 김씨가 있었고 인현왕후가 사망할 당시 품계는 숙빈 최씨보다 1단계 낮은 귀인이었지만[* 이때 숙종의 후궁들 중 빈의 [[지위]]에 있던 사람은 장희빈을 제외하면 숙빈 최씨가 유일했다.] 한미한 집안 출신인 숙빈 최씨와 달리 영빈 김씨는 조선 역대 사상 이 정도 문벌이 없다 싶을 정도로 부계·모계가 엄청난 집안 출신이었다. 그러니 만약 후궁들 중에서 다음 왕비를 고른다면 1순위는 숙빈 최씨가 아니라 영빈 김씨일 수밖에 없었다.[* 그 예시로 [[중종(조선)|중종]] 때 [[장경왕후]]가 죽자 중종은 [[경빈 박씨(중종)|경빈 박씨]]를 왕비로 삼고 싶어했는데 [[정광필]]이 '왕비는 좋은 집안에서 들여야 한다.'고 주장해 무산시켰다.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ka_11207022_012|#]] 그렇고 보면 당파와 그 시대의 극명한 신분제 사회를 감안할 때 숙종이라 할지라도 숙빈 최씨를 왕비로 삼기란 무리일뿐더러 숙종 본인이 그럴 의지를 표명한 적도 없다.] 숙빈 최씨가 숙종의 유일한 후궁이었더라도 오르지 못할 자리였다. 또한 교지의 타깃은 숙빈 최씨가 아니라 당연히 영빈 김씨이다. 숙종이 영빈 김씨에게 악감정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. 영빈 김씨는 [[기사환국]]이 터지고 한 달이 안 된 시점에서 왕의 동정과 궁중 기밀에 관한 정보를 친정에 빼돌리고 이모부 [[홍치상]][* [[효종(조선)|효종]]의 차녀 [[숙안공주]]의 아들로 숙종의 고종 사촌이다.]과 작당하여 장희빈의 친정 어머니에 관한 [[유언비어]]를 날조한 혐의가 적발되어 폐출되었고 홍치상은 처형당했다.[* 이 일이 있고 10일 후에 인현왕후도 폐출된다. 숙종이 이 일의 배후로 인현왕후를 지목했다 한다.] 영빈 김씨는 후에 인현왕후가 복위할 때 같이 복위했지만, 숙빈 최씨가 회임과 왕자 생산으로 계속해서 품계가 올라 정1품 빈이 되고 다른 후궁들도 하나하나 승급할 때에도 홀로 귀인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. 역시 인현왕후 복위 때 같이 복권되었던 홍치상의 경우 그의 아들인 홍태유[* 영빈 김씨에게는 이종사촌 동생이 된다.]가 홍치상의 무고함을 밝혀달라고 호소했으나, 숙종이 오히려 더욱 분노하여 복권을 거부하고 아예 명예회복을 영원히 금지했다. 영빈 김씨는 [[인원왕후]] 책봉 때에야 간신히 빈으로 승봉되었다.[* 원래 내명부의 새로운 수장이 들어서면 후궁들의 품계를 올려주는 것이 관례였다. [[인조]] 때 [[인렬왕후]]가 죽어 계비인 [[장렬왕후]]를 간택하였는데 이 때도 [[소용 조씨|숙원 조씨]]를 비롯한 대부분의 후궁이 승봉되었다.] 이후 인원왕후는 [[양자(가족)|양자]]로 입적된 연잉군을 지켜주고 왕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, 숙빈 최씨에게는 인원왕후가 아들의 은인이다.[* 물론 인원왕후가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왕자와도 척을 지어 굳이 껄끄러운 관계를 만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.] 실제로 뒷날 영조도 인원왕후를 친어머니 모시듯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.[* [[경종(조선)|경종]]은 인현왕후 민씨의 아들로 입적하였고 영조는 인원왕후 김씨의 아들로 입적하였다. 인원왕후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아들인 영조가 더 이뻐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.] * [[승정원일기]]에 기록되었을 정도로 굉장히 [[떡볶이]]를 좋아했다고 한다. 아들인 영조가 신하와 나눈 대화에서 "모친은 [[절편]]과 병자([[餠]][[炙]])를 좋아하시는데, 나는 치아가 좋질 않아서 먹질 못한다"라는 대목이 있는데, 여기서 병자는 떡과 고기, 각종 채소를 넣고 찐 음식, 즉 [[떡볶이]]를 의미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